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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 최승범-

toonickle 2019. 7. 7. 16:15

  참 오랫동안 이런 책을 기다려왔다. 기다린 보람에 부응하듯 내용은 막힘없이 술술 읽히고, 논리와 구성은 빠짐없이 탄탄했으며, 어떠한 과장이나 비약도 없이 한국의 여성에 대한 (차별)대우를 500% 적나라한 민낯으로 보여주는 책이었다.

  왜 기다렸는고 하니, '남자'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바라보는 페미니즘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한국이라는 나라에 페미니즘에 관해 진지한 분석을 하는 남성이 과연 몇이나 존재할까, 그게 궁금하긴 했지만.) 그리고 참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남자'라는 기득권 세력의 입장에서 '여자'라는 취약 계층(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현실이 암울해 보인다...)이 겪는 일상 생활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녹아 상당히 객관적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공감은 커녕 발견조차 어려운 차별을 이렇게 속속들이 파내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려 노력하다니. 그리고 자신이 뭇 남성들로부터 받을 비난과 비아냥, 공격을 모두 감수하고서도 용기있게 이런 책을 출간까지 해주다니. 단 한번도 실제로 만나보지도 못한 남성에게 이 정도로 진심어린 존경을 보내보기는 참 오랜만이다.

 

  저자는 자신이 어떻게 남자로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지고, 나아가 페미니스트가 되었는지 자신의 가정사에서부터 시작한다. '그 시절'에는 다 '그렇게' 사는 게 '일반적'이었던 이야기, 즉 아버지는 나가서 돈벌고 어머니는 주부로 일하고... 그러다 어머니가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직업을 가지고 일하게 되셨는데도 여전히 가사 '노동'(노동이라는 단어는 아주 중요하다)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었던 일. 그런 어머니가 안타깝다 못해 스스로 설거지나 청소 등을 직접 도와드려도 아버지의 반응은 '엄마가 본인이 할 일을 소홀히 해서 네가 하고 있다'였던 것. 현실이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저자는 서서히 여자들의 삶이 처음부터 남자들과 다른 선상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파악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견고하고도 잔인한 여성에 대한 차별의 벽에 아주 조그만 금이라도 내서 서서히 무너뜨려 보고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근차근 뚝심있게 시작한다.

 

  당연히 저자를 둘러싼 현실은 녹록치 않다. 역시나 대다수의 남자들은 마뜩찮은 시선을 던졌다. '남자가 뭐가 아쉬워서 페미니스트냐', '메갈이다', '그거 다 여자한테 인기 좀 얻으려고 겉치레로 하는 행동 아니냐' 등등... 게다가 저자는, '남자 고등학교' 국어 교사다! 학생들이 자신에게 페미니즘을 전수하려 노력하는 스승에게 그다지 호의적이거나 협조적이지 않을까... 했는데, 물론 처음에는 반발이 꽤 있었지만 저자의 너무나도 세련되고(! ^^) 멋진 전략에 하나 둘 집중을 하며 이 빌어먹으리만치 여자에게 불공평한 한국 사회를 차세대들이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지 인생 수업을 받는다. 저자는 결코, 학생들에게 강요하거나 싫어도 밀어붙이는 무식하고 요령없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의 거시적인 쟁점, 즉 약자들에 대한 배려라는 큰 주제로 시작해서 그 중에 여성이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차별받고 살아온 존재이다... 인성을 갈고 닦는 방법에는 약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큰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남자로서 여자에 대한 그릇되고 부당한 대우를 어떻게 개선할 지 고민한다면 여러분은 정말 멋지고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하지 않겠느냐...! 이렇게 조심스럽고 자연~~스럽게 성 평등을 학생들의 관심사로 편입시키면서 페미니즘의 여러 주제에 대해 학생들의 의견도 듣고, 자신의 생각도 알려주는 참으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가르침의 시간을 가지신다. (참 감동이었다. 과연 교사의 자질은 아무나 타고나는 게 아니구나 싶었음)

 

 

 저자는 한국 여성의 불평등 실태를 면밀히 조사하고 여러 페미니즘 서적을 읽으며 방대한 자료를 모아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성실함도 보여주었다. '여자는 남편이 없어야 장수하지만 남자는 아내가 있어야 장수한다', '대한민국 여자와 남자의 가사 노동 시간 실태' '한국의 충격적인 성범죄 실태, 그리고 그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 등등... 나아가 자신의 전공인 국어 교육을 통해, 한국의 문학적 걸작들이라 일컬어지는 여러 편의 작품에 드러나는 성차별 및 성폭력 내용까지 진지하고 심층적으로 분석해 놓았다. (춘향전, 사씨남정기, 메밀꽃 필 무렵 등)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우리나라 문학에서부터 이런 어처구니없고도 뻔뻔한(!) 여성 비하 및 순종 강요가 제대로 파헤쳐져야 한다는 일념 하에. 하기사 '그 때의 성 역할이 그렇게 고정되어 있었으니 내용이 그렇게 그려진 것은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설득력이 있겠지만, 그러면 (많지는 않겠지만) 양성 간의 성별 역할이 그토록 적나라하게 구분되지 않은 작품을 실으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굳이 시(저자는 이육사, 김소월의 시를 예로 든다)에 어이없는 '남성적 어조, 여성적 어조'를 같다 붙일 필요도 없고 말이다.

 

  책의 문장 하나하나, 내용 모두 구구절절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뼛속까지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저자가 예리하게 짚어낸 한국 사회의 성차별 현황에 대한 고발은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지만, (그래서 책 내용 전체를 이 독후감에 옮겨놓고 싶지만!) 정말이지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도 엄청남 필력을 통해 문제를 제기한다. 아래의 내용이 그것이다:

 

  우리는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왜 잃어버릴 짓을 했냐고 몰아세우지 않는다. 길 가다 맞은 사람에게 왜 맞을 짓을 했냐고 힐난하지 않는다. 살인, 방화, 강도, 사기, 협박 등 어떤 범죄도 피해자에게 ‘왜 조심하지 않았냐’고 따져 묻지 않는다. 오직 성범죄 피해자에게만 왜 옷을 그렇게 입었냐고, 왜 화장을 그렇게 했냐고, 왜 그 늦은 시간에 귀가했냐고, 왜 술을 마셨냐고, 왜 혼자 다녔냐고, 왜 저항하지 않았냐고 따진다.

 

  이 문장을 읽고 '어 정말 그러네...'하고 이마를 탁 치지 않을 여자가 한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 혼자 늦은 밤에 술을 마셔도 딱히 별다른 걱정 없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한국 남자들이, 아예 '살해'당할 위협에 노출되어 무서워하는 한국 여자들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게 얼마나 큰 혜택이자 특권인지, 마치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자각조차 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결국 범죄의 대상이 되고야 말아버리는 여성에게는 오히려 피해자에게 화살을 돌리는 이 극악무도한 현실이, 남자가 약자의 입장에서 원통함을 정말 손톱만큼이라도 느껴볼 수 있는 역지사지의 기회조차 줄 수없는 것인지.

 

  한 국가의 수준은 그 사회의 약자를 어떻게 대우하는 지에 결정된다고 한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은 정말 반론의 여지가 없는 후진국이다. 약자들을 위한 복지 시설을 아무리 많이 세우고 금전적인 혜택까지 누릴 수 있게 해주어도, 국민의 의식이 따라가 주지 않으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아동보다, 장애인보다, 이민자보다, 저소득층보다...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마이너리티는 여성이다. 그리고 인류가 진정으로 번영을 누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양성이 동등한 권익을 누리는 것이다. 절대로, 결코, 한쪽이 다른 쪽을 억압하면서 지속가능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의 결실을 볼 수 없다.  

 

  곧 태어날 딸을 핑크와 리본에 가두지 않고, 성 중립적인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 아이가 여자라서 꿈을 꺾지 않고, 여자라서 참지 않으며, 여자라서 자기를 단속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존엄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이 말이 한국, 나아가 세계 모든 여성들에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건네는 한 마디 같아 무척 위안이 되고 고맙다. 이렇게 말해주는 남자들이 하나, 둘, 그리고 열, 백, 천만, 일억... 그렇게 불어나서 온 세상 남성들이 되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은 너무 거창할까. 저자가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한 남자 동료들에게 듣고 힘이 났다고 하는 아래 응원으로 이번 책의 독후감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길이 험해 힘들고 답답하시겠지만 지치지 마세요. 저도 함께 걷고 있어요."